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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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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5/6월 딸깍발이 생각 2017. 05.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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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통한 가치 실현에 대해 

<'감정의 격동'과 '시간과 타자'>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도중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의 말다툼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가 여자에게 격한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자, 여자는 오빠라고 칭하는 남자에게 '너무 감정적'으로 말하지 말라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다. 

  이성과 감성, 너무나 그럴듯한 이야기다. 그런데 정말 이성만이 올바른 판단의 길이고, 감정은 억누르고 감추거나 심지어 없애야하는 그런 것일까(그런다고 없앨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너무 쉽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라고 인식하고 산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성'의 인식으로 인해 각 개인의 존재적 주체성이 드러나고 마치 어지러운 사회의 모든 질서는 이성을 통해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이성과 합리주의적 사고는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면서 '도구적 이성'과 '목적합리성'으로 전락하여 각종 전쟁과 다툼, 비인간화를 만들어냈다. 

  이성이 과거에 긍정적으로 해온 역할은 부정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점들이 '이성'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현실은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무엇이 이를 대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감정의 격동>의 저자 마사 누스바움은 '감정'이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감정의 형태들을 이해하고 살핌으로써 우리의 개인 및 사회적 문제들의 원인과 해결책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이 과거에 해온 이성의 역할을 수행하고 뛰어넘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믿음'은 감정이 인식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의 실현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정치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이며 여성학자이고 현재 시카고 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있는 그녀는 다양한 현대 사회의 문제점 및 해결 방안을 '감정'을 통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 쉽게 분노나 '화'를 표상하기 때문에 감정 전체의 다양성을 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정서에는 사랑이나 연민, 경탄, 희망, 환희 등 다양하다. 여기서 누스바움이 말하는 감정 중 연민에 대해서 예를 들면 그는 연민을 세 가지 인지적 요소로 나누고 있다. 

첫째. 크기에 대한 판단
둘째.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셋째. 행복주의적 판단 

  첫째로 말한 '크기에 대한 판단'에서 예를 들면 한 아이가 넘어저 무릎에 살짝 멍이 든 것과 넘어져 무릎에 피가 철철 흐르고 살이 깊게 찢어져 연골까지 볼 일 때 우리는 후자에 대한 연민을 더 '크게' 느끼고 전자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넘어간다.

  둘째부분의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은 세월호 같은 경우를 들 수 있다. 희생자와 그 아이들의 부모를 보며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것은 희생자와 희생자의 유가족 잘못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에 그 부모들이 이 고통을 자초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희생자와 유가족이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모두에게 발현되는 판단이다. 

  셋째는 행복주의적 판단이다. 이것은 누스바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내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기획의 중요한 요소, 목적으로 그에게 좋은 일을 촉진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이에 대해 누스바움은 덧붙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행복주의적 판단에 부분집합적으로 끌어들인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은 연민이라는 감정에 대해 우리가 이 세가지에 대한 구성주의적 입장으로 살펴보길 권한다. 여기 각기 다른 상황에서 즉 첫째 둘째 셋째의 각기 개별적 상황에 따라 우리의 정서인 '연민'이 발할 수 있는데 이것이 모두 함께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부분이다. 

  세월호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 큰 아픔과 연민을 일으키는 것은 첫째 물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숨을 쉴 수 없는 그 시간들의 고통과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너무나 '큰' 고통을 표상하게 만들며, 그 수 많은 희생자들의 '크기' 또한 연민을 발하게 한다. 

  둘째는 위에서 언급했으며, 셋째의 경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유가족 당사자들에게 그들과 함께 세운 그들의 목표와 기획 안에 중요한 사람으로서 상실감을 일으켜, 당연 행복주의적 부분을 저해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연민을 일으키며, 내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나의 친척이, 조카가, 아는 사람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주의적 관점에서 우리의 연민을 일으킨다. 때문에 '세월호'가 우리에게 또는 우리 사회에게 큰 아픔과 연민을 발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세가지 요건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다른 상황에서 '연민'에 대한 부정적 측면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여기서는 스피노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민에 대한 부분인데 그가 말한대로 '나도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될 가능성을 볼 때 느껴지는, 다른 사람과 사이의 '유사성'만을 고려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들이다.

  과거 중세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결코 하층 계급이 될 일이 없다는 당대 '현실'을 믿었기 때문에 하층 계급에 대한 '연민'을 결여하게 된다. '유사성'에 대한 부분만으로 연민을 이해하게 되면 이같은 유사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집단에 대해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사회의 집단과 집단의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세월호에 대해 어느 혹자는 그 사건과 관련하여 '나는 자식도 없고 어린 친인척도 없으며, 아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세월호 같은 배를 탈 일도 전혀 없다. 라는 '유사성'이 없다는 인식 속에서는 세월호의 아픔을 동감하기 어려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연민'이라는 정서는 매우 중요하며, 누스바움이 이야기한 세 가지의 측면에서 고려하여 '연민'을 발해야 한다. 그럼 누스바움이 말하는 세 가지 측면만을 고려하면 되는 것일까. 이 세가지 측면은 누스바움이 말하는 인지적 측면에서 나오는 '연민'이다. 
 
  이 책과 우리가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으로는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를 추천해주고 싶다. 그는 세월호 같은 엄청난 고통에 대해 우리에게 그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주목하라고 강조한다. 

  그는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에 동참할 때 우리의 '윤리적 주체성'을 실현시킬 수 있고 말한다.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인식하고 무언가 그를 위해 '노력하려 할 때' 우리는 그저 '존재'에서, 의식하고 인식하며 행동하는 '존재자'로 바뀔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레비나스는 윤리적 주체로서 우리의 존재를 입증하려 했지만 우리의 존재는 윤리적 사건의 전제를 통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인의 고통까지 포함한 타자에 대한 열린 관계를 궁금해하고 희망할 때 그 자체가 윤리가 되는 것이다. 이 때 주체성과 동시에 윤리가 회복된다. 때문에 타인에 대한 관심은 나의 존재적 당위일 수 밖에 없다. 

  그가 말하는 '주거'와 '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들은 모두 '평안한 삶'을 추구하는 '동일자'이기 때문에 이 때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런 동일한 생각에서 벗어나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가 느끼는 고통에 동참하려는 '감정'으로 다가설 때 우리는 존재에 대한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이런 연민에 대한 감정은 누구를 함부로 쉽게 예단(豫斷)하여 바라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연민이나 타인의 고통의 감정을 느끼려는 것은 '노력할 때'가 아닌 '노력하려할 때'라는 '지향성'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때문에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동참하고 나온 결과로써 우리의 '나'됨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의 고통을 살피는 감정의 노력을 하려할 때, 섣불리 그들을 위한다는 생각이 아닌 그들의 고통 속에서 '나'의 '나됨'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남을 위한 연민이나 고통에 동참하려는 감정은 단순히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의 발현이 아니다. 이것은 연민이라는 '감정'을 통해 나의 존재와 사회의 윤리를 실현하는 중요한 인식적 가치의 실현이다. 오늘도 수 많은 타인의 얼굴이 우리의 앞을 스쳐간다. 이제 잠시 '이성'의 논리를 접어두고 내가 느끼는 '감정' 속에서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면 어떨까. 그럴 때 그 속에서 우리는 타자를 수용하고 그들을 '환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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